트랙에 이름을 적는 동안 가람이 내 어깨 너머를 봤다.
“PD님, 저희 이름으로 저장해주시는 거예요?”
“응. 헷갈리니까.”
“저 가이드 녹음할 때 맨날 여자 이 번이었는데.”
가람이 웃었다. 세온은 옆에 앉으면서도 목소리가 들어간 파일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네 사람의 이름을 다 적고 저장했다.
“방금 부른 거 다시 들어볼래?”
가람의 웃음이 조금 줄었다.
“꼭 들어야 돼요?”
“네 목소리만 크게 나와서 그래?”
“네.”
도린이 옆에서 말했다.
“네 것만 들리진 않았어.”
“언니, 위로해주는 거야?”
“내 것도 이상했어.”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가 웃었다. 이번에는 도린도 입꼬리가 조금 움직였다.
나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네 목소리가 한꺼번에 나왔다. 끝음이 갈라지는 구간에서 세온이 가사지를 내려다봤고, 리에는 한쪽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아까보다 표정들이 나았다. 처음에는 망했다는 얼굴이었는데, 이번에는 어디서 달라지는지 듣고 있었다.
“누가 틀렸는지 찾을 필요 없어. 나도 아직 너희한테 같이 어떻게 부를지 얘기를 안 했잖아.”
내가 마지막 구간을 다시 재생하자 도린이 물었다.
“여기 끝나는 거 맞추면 돼요?”
“그것도 해야 하는데, 일단 다른 것부터 해보자.”
가람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는 가이드 보컬을 껐다.
“도린이랑 가람이만. 음 맞추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말하듯이 읽어봐.”
도린은 바로 시작하려다가 가람을 봤다.
“같이?”
“응.”
둘은 첫 단어부터 다른 곳에 힘을 줬다.
가람은 앞을 또렷하게 읽고 뒤를 가볍게 넘겼다. 도린은 문장 뒤쪽을 눌러서 끝냈다. 둘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동시에 말하니 문장이 두 개로 들렸다.
나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가람이는 도린이 끝나는 데까지 들어봐. 도린이는 앞을 조금만 가볍게.”
두 번째에는 가람이 먼저 멈췄다.
“이러면 돼요?”
“방금은 도린이 기다리느라 네 말이 없어졌어. 한 번 더.”
이번에는 둘이 서로를 봤다.
도린이 작게 숫자를 세고 들어갔다. 앞보다 덜 밀렸고, 끝나는 자리도 가까워졌다.
옆에서 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같이 들려요.”
가람이 녹음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시 들려주세요.”
처음보다 나아졌다는 말을 내가 하기 전에, 가람이 먼저 자기 목소리를 찾았다.
“아, 제가 여기까지 끌었구나.”
“응. 도린이는 이미 끝났는데 혼자 남아 있었어.”
“그래서 제가 더 크게 들렸나 봐요.”
가람이 자기 가사지의 끝에 선을 그었다. 그러고는 도린의 종이를 당겨 같은 위치를 가리켰다.
“언니도 여기 표시해놔.”
도린은 가람이 준 펜을 받아 짧게 그었다.
나는 다음 구간으로 넘어갔다.
세온과 리에에게는 후렴 앞부분을 나눠줬다.
“세온이가 앞의 두 마디, 리에가 뒤의 두 마디.”
세온이 바로 가사에 표시했다. 리에는 내 화면과 종이를 번갈아 봤다.
“높은 데도 제가 해요?”
“지금은 해보자. 안 맞으면 바꿀 거야.”
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주가 시작되자 세온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소리도 좋고 음정도 안정적이었다. 다만 다음 사람에게 넘길 때까지 자기 파트를 완벽하게 마치려는 느낌이 있었다.
리에가 들어갈 틈이 좁았다.
나는 리에가 끝까지 부른 뒤 재생을 멈췄다.
“세온아. 끝을 조금 짧게 해볼래?”
“여기요?”
세온이 마지막 음절을 짚었다.
“응. 끝까지 붙들고 있지 말고.”
“그러면 끊겨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둘이 같이 확인해보려고.”
세온은 종이에 작게 표시했다.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앞사람의 소리가 끝나기 전에 리에의 숨이 들렸다. 첫 음도 아까보다 정확했다.
그런데 두 번째 마디에서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리에는 끝나자마자 입술을 다물었다.
“높아서 힘들어?”
내가 묻자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처음은 괜찮은데, 뒤에서 소리가 달라져요.”
세온이 리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한테 맞추려고 한 거야?”
잠깐 생각하던 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다음에 나오니까 너무 다르면 이상할 것 같아서.”
나는 헤드폰을 벗었다.
녹음을 들을 때는 작아진 소리만 들렸다. 옆 사람을 따라 하려다 그렇게 된 건지, 본인이 내기 어려워서인지 내가 먼저 단정할 뻔했다.
“리에야. 이번에는 세온이처럼 안 불러도 돼.”
리에는 가사지에서 눈을 들었다.
“많이 달라도 돼요?”
“응. 네가 편하게 부른 걸 들어야 내가 고칠 수 있어.”
리에는 조금 전 자기 차례를 확인하던 부분부터 다시 보고, 손가락으로 가사를 짚었다.
세온은 이번에도 끝을 짧게 정리했다. 이어진 리에의 목소리는 확실히 달랐다. 세온보다 가볍고, 음이 올라가도 소리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단어는 조금 불안했지만 아까처럼 중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 부분을 따로 저장했다.
“이쪽이 낫다. 마지막은 나중에 다시 보고.”
리에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아까 거랑 같이 들어봐도 돼요?”
두 개를 차례로 들려줬다.
자기 목소리가 나오는 동안 리에는 가사지를 보지 않았다. 화면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종이에 뭔가 적었다.
나는 뭐라고 썼는지 묻지 않았다.
아직 첫날이었다.
내가 궁금한 것을 전부 알아야 작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네 마디를 나눠 부르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도린과 가람의 리듬을 맞추고, 세온의 끝음을 줄이고, 리에가 들어오는 위치를 다시 잡았다. 조금 좋아졌다 싶으면 다른 곳이 흔들렸다.
가람은 세 번 연속 같은 부분에서 틀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잠깐만요. 이제 어디서 들어가는지 다 똑같이 들려요.”
도린이 자기 물병을 가람 쪽으로 밀었다가 멈췄다.
“네 거 저기.”
“알아. 나도 내 거 먹을 거야.”
가람이 웃으면서 물병을 가져갔다.
나는 재생을 멈추고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가 다 돼 있었다.
“점심 먹고 다시 하자.”
넷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밥 안 먹어?”
세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후에도 하시는 거예요?”
“응. 다른 일정 있어?”
“아뇨. 오늘은 오전에만 봐주시는 줄 알았어요.”
가람이 옆에서 덧붙였다.
“선곡만 해주신다고 들어서요.”
나는 닫아뒀던 서류철을 봤다.
지난번에는 정말 선곡만 하고 나왔다. 급하게 고칠 다른 가수의 곡이 있었고, 개인 연습을 해오면 다음에 봐주겠다고 했다.
네 명이 함께 부르는 걸 이렇게 오래 들어본 날이 있었나.
데뷔 준비 때는 있었다. 그전에, 연습생이었을 때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은 오후에도 여기 있을 거야. 학교나 다른 일정 있으면 미리 얘기해줘.”
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세 시에 댄스 수업 있어요.”
“그전까지 하면 되겠다.”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내 노트북을 봤다.
“PD님은 뭐 드세요?”
“가서 보고.”
“저희 편의점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말에 나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람이 다른 애들을 돌아봤다. 같이 가자고 한 사람치고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편의점에 가는 길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제작팀장의 메일이었다. 수정한 계약서를 보냈으니 확인해달라는 메시지도 함께 왔다.
나는 길 한쪽으로 비켜 첨부 파일을 열었다.
담당 업무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외부 제안 시 사전 협의한다는 문장도 추가됐다. 크레딧은 곡별 작업 내용을 확인해 별도로 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충분하지 않은 부분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일단 오늘 합의한 것은 적혀 있었다.
회의 때 말한 내용과 일치한다고 답하고 파일을 따로 저장했다. 나머지 조항은 저녁에 다시 볼 생각이었다.
고개를 들자 도린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람과 세온은 먼저 편의점 문을 열었고, 리에는 문을 잡은 채 우리 쪽을 봤다.
“먼저 들어가지.”
내 말에 도린이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가람이가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더 설명할 필요가 있냐는 말투였다.
나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그러네.”
도린이 먼저 걸었다. 검은 가방의 분홍색 토끼가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나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골랐다.
가람은 계산대 앞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하나를 바꿨다. 세온은 음료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고, 리에는 빵의 포장 뒷면을 읽고 있었다.
네 사람 것까지 계산하려고 카드를 꺼냈다가 멈췄다.
처음 같이 먹는 점심인데, 내가 사주면 급하게 더 고르거나 고른 걸 바꿀 것 같았다.
“다 골랐어? 오늘은 내가 살게. 더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와.”
가람이 제일 먼저 대답했다.
“진짜요?”
“응.”
“그럼 저 이것만 하나 더…….”
바로 옆에 있던 삶은 달걀을 집더니 내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계산대에 같이 올려놓으라고 손짓했다.
세온은 잠깐 고민하다 바나나를 가져왔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리에는 들고 있던 빵을 그대로 내밀었다. 도린도 고른 것을 바꾸지 않았다.
편의점 바깥 탁자에 앉자 가람이 달걀 포장을 뜯으며 물었다.
“PD님, 원래 가수도 하셨어요?”
“아니.”
“가이드 목소리 좋던데요.”
“들려주려고 부른 건 아니라 좀 대충 했어.”
“대충 한 게 그거예요?”
옆에서 도린이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가이드라서 대충 하신다는 뜻은 아니지.”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그 뜻 아니야.”
“알아. PD님 샌드위치 못 드시잖아.”
실제로 질문에 답하느라 포장만 뜯고 있었다.
가람이 내 손을 보고 웃었다.
“아, 죄송해요. 드세요. 저 안 물어볼게요.”
나는 샌드위치를 한 입 먹었다.
아까부터 속이 비어 있었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다. 씹기 시작하자 그제야 허기가 났다.
세온은 내 앞에 놓인 냅킨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우유를 조금 옮겨 올려놨다.
대단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가람이 새로 나온 삼각김밥은 다시 안 사겠다고 했고, 도린은 이미 다 먹었으면서 왜 그러냐고 했다. 리에는 계산할 때 받은 빨대를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었다. 세온이 버려줄까 묻자 나중에 쓸 거라고 답했다.
나는 먹으면서 네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연습실에서보다 말끝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가람은 생각보다 낮게 말했고, 도린도 가람의 말에 답할 때는 딱딱하지 않았다.
저 말투를 녹음실에 조금만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손이 멈췄다.
순간 몇 년 뒤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시상식 객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모습이었다.
지금은 데뷔한 지 삼 년쯤 됐을 것이다.
메시지를 열었다.
이어 사진 한 장이 왔다. 공항 면세점 진열대에 과자 상자가 늘어서 있었다.
나는 사진을 확대했다. 틀렸다. 비슷한 포장이긴 했다.
답장을 보내자 거의 바로 읽음 표시가 사라졌다.
나는 입에 남은 것을 삼키고 답했다.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
뭐라고 답할지 생각하는데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포장지를 모으던 중이었다.
“PD님 것도 버릴까요?”
“아직 먹고 있어.”
“아, 네.”
가람이 다시 앉았다. 힐끗 화면 쪽으로 시선이 왔다가 바로 돌아갔다.
“혹시…… 한이준이요?”
나는 휴대전화를 엎어놓았다.
가람이 급하게 덧붙였다.
“죄송해요.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이름이 보여서요.”
“응. 아는 사람이야.”
“그 한이준이요?”
도린이 가람을 봤다.
“한이준이 다 네가 아는 한이준이겠어?”
가람은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를 봤다.
나는 남은 샌드위치를 집었다.
“일단 먹자. 오후에 할 거 많아.”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네 사람을 일렬로 세우지 않았다.
도린과 가람이 앞 구간을 번갈아 받고, 세온이 이어받은 뒤 리에가 마지막을 정리하게 했다. 같은 멜로디를 네 명이 끝까지 부르게 했을 때보다 각자의 소리가 잘 들렸다.
다만 세온에게서 리에로 넘어갈 때 곡의 힘이 빠졌다.
나는 반주에서 소리를 몇 개 뺐다. 세온이 부르는 동안 쌓였던 것을 리에 앞에서 조금 덜어내자, 작은 목소리도 들렸다.
도린이 스피커를 봤다.
“음악도 바뀌는 거예요?”
“목소리에 맞게 바꿔야지.”
“저희가 맞추는 줄 알았어요.”
“그것도 해야 돼.”
내가 말하자 가람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 편해지는 건 아니구나.”
“방금보다 어려운 건 안 시켰잖아.”
“지금까지는요.”
가람이 얼른 대답하고 가사지를 들었다.
나는 웃다가 재생 위치를 옮겼다.
이번에는 시작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중간에 가람이 음을 놓쳤고, 리에의 끝도 조금 흔들렸지만 흐름은 이어졌다.
녹음을 들려주자 네 사람 모두 아까보다 가까이 왔다.
세온이 먼저 말했다.
“이렇게 부르니까 리에 목소리가 들려요.”
리에는 대답 대신 마지막 부분을 다시 들려달라고 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작팀 직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PD님, 잠깐 괜찮으세요?”
나는 녹음을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직원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평가곡 때문에요. 아까 회의 끝나고 변경 사항이 있어서.”
화면에는 강태오가 보낸 파일이 떠 있었다.
“이 곡으로 두 팀 다 진행하면 된대요. 같은 곡이어야 비교하기 좋다고.”
나는 파일명을 다시 봤다.
“다른 팀도 오늘부터요?”
“아뇨. A팀은 지난주부터 연습했어요. 원래 그쪽에서 먼저 검토하던 곡이라.”
지난주.
내가 저 데모를 강태오에게 보낸 다음 날부터였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준비하신 거 많이 달라요?”
문 안쪽에서 가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에야, 아까 네 거 한 번만 더 해봐. 나 여기 들어가는 거 듣게.”
나는 돌아보지 않고 직원에게 물었다.
“강 PD님 지금 어디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