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오는 계약서를 가져가지 않았다.
나는 내민 손을 거두고 기다렸다. 무릎 위에서 바지 솔기를 쓸고 싶은 걸 참았다. 말은 해놓고도 손끝에서는 계속 땀이 났다.
제작팀장이 먼저 노트북을 당겼다.
“서경 씨가 맡는 업무를 명시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크레딧은 곡마다 참여자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별도로 확인하는 걸로 하고.”
“확인하고 나서 저한테도 보내주세요.”
“네. 외부 제안은…….”
팀장이 말을 멈추고 강태오를 봤다.
그가 계약서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데모를 회사에서 검토도 못 하게 할 건 아니죠?”
“검토는 하셔야죠. 다른 가수나 제작사에 보내기 전에 저한테 말씀해달라는 겁니다.”
“기회가 급하게 들어오면?”
“저도 전화는 받아요.”
말하고 나서 조금 세게 나갔나 싶었다.
하지만 강태오는 늘 급한 연락에 내가 얼마나 빨리 답하는지 알고 있었다. 새벽 세 시에도 받았으니까.
제작팀장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럼 외부 제안 시 사전 협의. 이 정도로 정리하고, 세부적인 건 수정본 보면서 얘기하죠.”
강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계약서에 직접 이름을 적어줄 거라는 기대는 버렸다. 이 자리에서 업무 담당자와 수정할 내용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지난번과는 달랐다.
“수정본은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점심 전까지 보내줄게요.”
“감사합니다.”
그제야 강태오가 팔짱을 풀었다.
“이제 들어보죠?”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세 번째 데모 대신 첫 번째 파일을 눌렀다.
“이거 말고 세 번째.”
“애들 평가 자료 보니까 이 곡이 더 맞을 것 같아서요. 먼저 들어주세요.”
드럼이 두 마디 흐른 뒤 가이드 보컬이 들어왔다. 내가 부른 목소리였다. 지금보다 조금 가볍고, 끝음을 필요 이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오 년 전의 나는 노래할 때도 눈치를 봤구나.
혼자 민망해하다가 볼륨을 조금 낮췄다.
강태오는 후렴까지 듣고 말했다.
“좀 약하지 않아요?”
“가이드가 높아서 그래요. 실제로는 낮출 생각입니다.”
“낮추면 더 약해지지.”
“한 명이 다 부를 건 아니니까요. 애들 목소리부터 듣고 파트 나누겠습니다.”
제작팀장이 자료를 넘겼다.
“그럼 이걸로 정한 거예요?”
“아뇨. 오늘 직접 들어보고 말씀드릴게요.”
예전 같으면 여기서 정했다. 열흘밖에 없으니까 결정을 늦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 시기의 네 사람이 어떻게 노래했는지 정확히 몰랐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데뷔 후의 목소리와, 내가 몇 년 동안 반복해서 들었던 녹음이었다.
열여섯 살의 리에가 어디서 숨을 쉬는지까지 기억한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연습실은 어디 쓰면 되죠?”
회의실을 나오자 강태오가 따라 나왔다.
복도 끝에서 직원 둘이 인사를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사람들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서경아.”
나는 연습생 자료를 든 채 돌아봤다.
“네.”
“아까는 왜 그랬어?”
“계약서요?”
“할 말 있으면 따로 하면 되잖아.”
우리가 사귄 걸 아는 사람 앞에서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단둘이 얘기하면 더 잘 풀릴 것처럼.
그러다 둘만 남으면 내가 얼마나 예민한 상태인지부터 얘기했다.
“팀장님도 같이 알아야 할 내용이라서요.”
“아직 나한테 감정 있어?”
나는 그의 얼굴을 봤다.
스물여덟 살의 나라면 저 말에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것이다. 헤어진 사람한테 못 할 말이라며 화를 냈거나,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물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연습실 위치가 더 궁금했다.
“업무 범위 확인하는 게 감정 때문이면, 다른 직원들도 다 감정 있어서 계약서 쓰나요?”
그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나도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막상 입 밖에 내놓으니 생각보다 후련해서, 더 보태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 좀 이상하다, 너.”
“회의 때 말씀드렸잖아요. 잠을 못 잤다고.”
그는 잠깐 나를 보다가 한 발 물러났다.
“일단 해봐. 열흘이야.”
“네.”
“어려우면 빨리 말하고. 끝까지 끌고 가는 게 애들한테도 좋은 건 아니니까.”
나는 자료를 고쳐 들었다.
“들어보고 말씀드릴게요.”
그가 돌아간 뒤에야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아직도 목소리를 들으면 몸부터 긴장했다.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하고, 그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미리 고르고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켜서 제작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내고 나서 연습실 위치를 물었다.
이번에는 머릿속으로만 정리해두지 않기로 했다.
지하 연습실 앞에서 잠깐 멈췄다.
문틈으로 음악이 들렸다. 같은 구간이 세 번 반복된 뒤, 누군가 말했다.
“언니, 거기 말고 바로 앞이요.”
“여기?”
“네. 발 바꾸는 데부터요.”
다시 음악이 시작됐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운동화가 바닥에 끌렸고, 박자에 맞춰 짧게 숫자 세는 소리가 났다. 음악이 끊기자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 잠깐. 나 오른발이 두 개야.”
“그럼 하나 빌려줘.”
“도린 언니는 안 틀리면서 왜 가져가.”
나는 웃음이 나려는 걸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안쪽이 조용해졌다.
문을 열자 네 명이 거울 앞에서 돌아섰다.
가장 먼저 가람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나머지 셋도 뒤따라 인사했다. 도린은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린 채였고, 세온은 바닥에 놓인 가사지를 집어 들었다. 리에는 틀어놓았던 음악부터 껐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아까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도린의 가방에 달린 토끼는 아직 한쪽 귀가 멀쩡했다. 가람은 머리를 고정한 끈을 만지다가 내 시선이 닿자 손을 내렸다. 세온의 가사지에는 이미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
리에는 태블릿을 가슴 앞에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윤서경이야. 이번 평가곡 제작하고 녹음 봐주기로 했어.”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팀장님한테 들었어요. PD님 오신다고.”
“기다렸어?”
“아뇨, 저희 방금…….”
가람이 바닥에 놓인 물병과 가방을 봤다. 방금 왔다고 하기에는 넷 다 땀이 나 있었다.
도린이 대신 말했다.
“아홉 시부터 있었어요.”
“아, 언니.”
가람이 작게 항의하자 도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어보셨잖아.”
나는 벽 쪽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계속 춤 연습한 거야?”
“반은요. 그전에는 개인 연습했어요.”
세온이 답했다. 말하는 동안 리에가 바닥에 있던 선을 한쪽으로 정리했다. 내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옮기는 것 같았다.
“고마워, 리에야.”
리에는 잠깐 눈을 들었다.
“네.”
네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료에도 적혀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름을 부르는 데 목이 조금 잠겼다.
나는 서류철을 열려다가 그대로 가방 위에 놓았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물도 마시고.”
넷이 거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의자를 끌어오지 않고 맞은편 바닥에 앉았다. 무릎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가람이 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PD님도 여기 앉으세요?”
“응. 왜?”
“아뇨. 의자 가져다드릴까 해서요.”
“괜찮아. 앉은 김에 이것 좀 물어볼게. 이번 평가에서 뭘 보여주고 싶어?”
넷의 시선이 잠깐씩 엇갈렸다.
질문을 잘못 알아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답을 해야 하는지 고르는 얼굴들이었다.
가람이 먼저 손을 조금 들었다.
“잘하는 거 말해도 돼요?”
“그러라고 물어본 건데.”
“아, 네. 저는 랩이요. 지금 연습하는 건 거의 노래라서, 짧게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직접 쓴 것도 있어?”
“있긴 한데…… 아직 보여드릴 정도는 아니고요.”
“나중에 들어볼게.”
가람이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온은 가사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폈다.
“저는 후렴이요. 지난번에는 끝까지 제대로 못 불러서요.”
자료에는 고음역 불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목이 힘들었어?”
“연습할 때는 됐는데 평가 때 자꾸 힘이 들어갔어요. 한 번 안 되니까 다음 것도 신경 쓰이고.”
“오늘도 같은 부분 들을 수 있을까?”
“네. 준비했어요.”
도린은 자기 차례가 오자 바로 말했다.
“저는 춤이요.”
대답하는 얼굴에 망설임이 없었다.
“노래는?”
“부를 수는 있어요.”
가람이 옆에서 웃음을 삼켰다. 도린이 그쪽을 한 번 보고 말을 덧붙였다.
“보여드리고 싶은 건 춤이라는 뜻이에요.”
“알겠어. 둘 다 볼게.”
마지막으로 리에를 봤다.
리에는 태블릿 화면을 껐다.
“저는 녹음해보고 싶어요.”
“녹음?”
“제가 부를 때랑 영상에서 들을 때랑 달라서요. 어디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어요.”
옆에서 듣던 세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노트북을 꺼냈다.
“그럼 오늘은 녹음부터 하자.”
연습실 스피커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가방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냈다. 정식 녹음은 나중에 하더라도 목소리를 비교하는 데는 충분했다.
네 명에게 같은 구간을 들려줬다. 아까 회의에서 틀었던 첫 번째 데모의 일부였다.
길지 않은 네 마디.
두 번 들려준 뒤, 가사 대신 편한 소리로 불러도 된다고 했다.
“지금 잘 부르는지 평가하는 거 아니야. 편한 높이부터 찾으려고.”
그 말만으로 긴장이 풀리지는 않았다.
가람은 자기 차례가 오기 전에 입술을 몇 번 움직였고, 세온은 첫 음을 아주 작게 확인했다. 도린은 가만히 서 있었지만 손끝으로 바지 옆선을 두드렸다.
나는 녹음 버튼을 눌렀다.
도린부터 시작했다.
낮은 음에서는 소리가 단정했는데, 음이 올라가자 갑자기 입안으로 들어갔다. 끝까지 듣고 같은 구간을 조금 낮춰 틀었다.
“이번에는 이 높이로 해볼래?”
도린이 첫 음을 확인하더니 다시 불렀다.
아까보다 말소리에 가까워졌다.
가람이 도린 쪽을 봤다.
“언니, 이게 훨씬 낫다.”
도린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봤다.
“그런데 원래 곡도 이렇게 낮춰요?”
“아직 안 정했어. 네가 편한 데가 어디인지 먼저 듣는 거야.”
“아.”
시선이 녹음기로 내려갔다. 무슨 말을 더 할 것 같더니 그냥 한 발 물러났다.
가람의 소리는 시작이 밝고 또렷했다. 대신 긴 음을 유지하는 동안 조금씩 흔들렸다. 본인도 느꼈는지 끝나자마자 웃었다.
“저 마지막에 좀 내려갔죠?”
“응. 한 번 더 하자. 이번에는 끝음을 길게 끌지 말고 말하듯이 끝내봐.”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짧아도 돼요?”
“네 파트가 되면 길이를 다시 맞춰야지. 지금은 비교해보는 거야.”
세온은 네 명 중 가장 안정적이었다. 음이 올라갈수록 소리가 맑아졌지만, 높은 음 바로 앞에서 숨을 너무 많이 썼다.
끝난 뒤에 내가 묻기도 전에 세온이 입을 열었다.
“앞부분을 너무 세게 불렀죠?”
“알고 있었어?”
“뒤에 가면 모자랄 것 같았어요.”
“그럼 이번에는 앞을 절반만 써봐. 잘 들리게 부르려고 하지 말고.”
세온은 가사지를 내려놓고 다시 불렀다.
높은 음 앞에서 어깨가 아까보다 덜 움직였다. 소리 끝까지 듣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온이 그제야 작게 웃었다.
리에는 첫 음이 조금 늦었다.
두 번째에는 맞았는데, 이번에는 끝나는 위치가 달랐다. 녹음을 들려주자 리에는 화면의 재생 위치를 유심히 봤다.
“한 번만 더 들어도 돼요?”
“응.”
같은 부분을 다시 틀었다.
리에는 듣는 동안 손가락을 작게 움직였다. 박자를 세고 있었다.
“제가 가이드 끝나는 데까지 기다렸어요.”
“맞아. 네가 들어와도 되는 자리인데 기다리고 있더라.”
“가이드 없이 해봐도 돼요?”
나는 보컬을 끄고 반주만 재생했다.
이번에는 첫 음이 맞았다.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끝음도 덜 흐려졌다.
녹음이 끝나고 리에가 나를 봤다.
“이게 나아요?”
“응. 같이 들어보자.”
넷이 녹음기 가까이 모였다.
리에는 자기 목소리를 듣고 눈썹을 조금 모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나는 파일 네 개를 저장했다.
고칠 것은 많았다. 열흘이면 전부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평가표에 적힌 몇 줄이 이 애들의 전부도 아니었다.
적어도 뭘 먼저 해야 하는지는 조금 보였다.
“잠깐 쉴까?”
가람이 물병을 집었다.
“PD님, 저희 오늘 노래 정해요?”
“오늘 안에 정하려고. 그전에 넷이 같이 부르는 것도 한 번 듣자.”
물병 뚜껑을 돌리던 손이 멈췄다.
세온이 내 노트북을 봤고, 도린은 옆으로 물러나 리에가 설 자리를 비워줬다.
나는 같은 구간을 재생했다.
네 명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첫 음부터 이상했다.
도린은 아래쪽을 단단하게 눌렀고, 가람은 밝은 소리로 치고 나왔다. 세온은 가이드의 길이를 따라갔고, 리에는 옆 사람 목소리를 듣다가 자기 소리를 줄였다.
네 마디가 끝나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가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저만 너무 컸죠?”
“가람이 문제만은 아니야.”
나는 녹음한 것을 다시 틀었다.
이번에는 도린이 미간을 좁혔다. 세온은 자기 가사지에 뭔가 적으려다 손을 멈췄다.
노래를 못해서만 생기는 소리가 아니었다.
“너희 넷이 같이 맞춰본 곡 있어?”
세온이 고개를 저었다.
“평가는 계속 개인으로 봤어요.”
“아까 춤 연습은?”
“같은 동작 겹치는 데만 같이 했어요.”
도린이 답했다.
나는 녹음을 멈췄다.
지난번의 나는 개인 평가표 네 장을 받고, 각자 부족한 점부터 고쳤다. 이번에도 방금까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자료 위에는 분명 네 사람이 한 팀처럼 묶여 있었다.
정작 이 애들은 함께 노래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준비해온 데모 목록을 닫고 빈 프로젝트를 열었다.
“물 마시고 와. 하나씩 다시 해보자.”
가람이 물병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까 그 부분이요?”
“응. 이번에는 파트를 다르게 줄게.”
나는 네 개의 트랙을 만들고, 맨 위부터 이름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