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프로듀서, 강태오 님! 축하드립니다!”
내가 만든 곡이 시상식장에 울렸다.
후렴 직전, 반 박자 비워둔 자리에서 함성이 터졌다. 편곡할 때 관객들이 따라 부를 틈을 만들고 싶어 넣은 부분이었다. 그때는 저 자리에 나도 있을 줄 알았다.
화면 속 강태오가 진행자에게 트로피를 받았다.
“먼저 제 음악을 믿어준 아티스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나는 대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 쪽으로 당겼다. 방금 전 그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밤 열한 시 사십팔 분이었다.
트로피를 받기 직전까지 수정 지시를 보낸 성실함은 인정해줘야 했다. 직접 고칠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번 수상은 누구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 싶으세요?”
진행자가 묻자 강태오가 웃었다.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럴 때 누구를 언급해야 보기 좋은지, 그는 잘 알았다.
“밤낮없이 함께해준 저희 팀이요.”
역시 내 이름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화면 아래로 대표작 세 곡의 제목이 지나갔다. 전부 내 하드에 처음 만든 파일이 남아 있었다.
첫 곡은 열아홉 번, 두 번째 곡은 서른두 번 고쳤다. 마지막 곡의 가이드를 녹음할 때는 편도선이 부어 침도 제대로 못 삼켰다. 아는 보컬에게 새벽에 전화해서 사정한 끝에 겨우 마감했다.
강태오는 아침에 파일을 듣고 답했다.
좋네. 이걸로 가자.
“왜, 또 서운해?”
옆에서 실장이 물었다.
“서경아. 곡 좋다고 다 팔리는 거 아닌 건 너도 알잖아.”
알았다.
처음에는 나도 고마웠다. 아무도 답하지 않던 내 메일에 강태오만 답장을 보냈으니까. 후렴은 좋은데 앞부분이 너무 길다며, 고쳐서 다시 보내줄 수 있냐고 했다.
그와 일하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만들어 월세를 냈다.
그와 사귀기 시작한 건 그보다 나중이었다.
밤샘 작업을 끝내고 해장국을 먹다가 고백을 받았다. 밥 먹는 사람 앞에 숟가락부터 놓아주던 손이 기억났다. 처음 곡이 팔린 날에는 내가 영수증을 챙길 틈도 없이 계산했다.
그때까지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나중이었다.
첫 곡에 내 이름이 빠졌을 때 그는 실수라고 했다. 다음 곡은 발매 일정이 급했고, 그다음에는 제작사와 얘기가 끝난 뒤였다. 따질 때마다 사정이 있었고, 대신 다음에는 제대로 챙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연애는 삼 년 만에 끝났는데, 그 약속은 계속됐다.
열세 곡이 나갈 때까지.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실장님. 저 재계약 안 하려고요.”
실장의 손에 들린 종이컵이 기울었다.
“그 얘기는 태오랑 해봤어?”
“오늘 말씀드리려고요.”
“둘이 무슨 일 있었어?”
헤어진 지 오 년도 넘었다. 그런데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면 아직도 그 질문부터 돌아왔다.
“계약 얘기예요.”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화면 속 강태오가 트로피를 들고 객석에 인사했다. 나는 그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새 작업이 들어오기 전에 말해야 했다.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나가라는 말을 또 들으면, 이번에도 몇 달은 지나갈 것 같았다.
독립하겠다고 말한 지 사흘 만에 작업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카드를 몇 번이나 다시 댔지만 출입 권한이 없다는 안내만 나왔다. 안에는 내 외장 하드와 헤드폰, 사비로 산 장비가 있었다.
실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시간 뒤에야 회사 보안 점검 중이니 기다리라는 메시지가 왔다.
닷새째에는 발매 전 음원이 유출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레째에는 기사에 내 이름이 실렸다.
첨부된 메일 화면을 확대했다. 발신자 이름은 윤서경. 내가 보낸 적 없는 메일이었다.
처음에는 해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컴퓨터와 메일 기록을 확인하면 금방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는 조사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다음 달에 녹음하자던 제작자는 잠깐 쉬어가는 게 어떠냐고 했고, 늘 급한 부탁을 하던 사람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태오와는 밤이 돼서야 통화가 됐다.
“제가 보낸 거 아니에요.”
“알았어. 일단 진정하고.”
“기사가 벌써 세 개나 났어요. 회사에서 아니라고 얘기해주셔야죠.”
수화기 너머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나가겠다고 한 직후잖아. 회사에서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제 메일 기록을 보시라고요.”
“작업 파일은 왜 개인 메일로 받아놨는데?”
집에서도 수정하려면 필요하지 않겠냐고, 먼저 말한 사람이 그였다.
“PD님이 그쪽으로 보내셨잖아요.”
“서경아.”
키보드 소리가 그쳤다.
“나한테까지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예전에도 다투다 보면 이런 순간이 왔다. 분명 내가 따질 일이 있었는데, 어느새 내 말투를 해명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과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입장 내주세요. 제가 안 보냈다는 거.”
“내가 얘기해볼게. 그러니까 다른 데 연락하지 말고 있어.”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작업실 비밀번호를 헷갈리면 어떤 숫자부터 누르는지 알았다. 잠을 못 잤을 때 커피를 몇 잔 마시는지도, 화가 나면 말을 고르느라 대답이 늦어진다는 것도.
그런 사람이 내 목소리를 듣고도 메일을 보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세온에게 연락이 왔다.
메시지를 읽다가 통화 버튼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괜찮다고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스물두 살인 애한테 울면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그 애도 회사와 앞으로의 활동을 두고 얘기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금 뒤 답장이 왔다.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보름 뒤, 네 사람의 해체 기사를 읽었다.
사진 속 도린은 턱을 살짝 들고 있었다. 검은 단발 안쪽으로 딥 틸 색 머리카락이 비쳤다. 세온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았고, 가람은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가장 끝에 선 리에는 턱을 조금 내린 채 정면을 보고 있었다.
데뷔 쇼케이스 사진이었다.
그날 리에는 사진이 올라온 뒤에도 한참 휴대전화만 보고 있었다. 내가 옆에 앉자 화면을 조금 기울여 보여줬다.
“PD님, 이 사진은 괜찮죠?”
“응. 마음에 들어?”
리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진을 저장했다. 무대에서는 손이 떨려 마이크를 놓칠 뻔했다더니, 사진에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 사진 아래에 활동 종료 안내가 붙어 있었다.
계약 기간 만료. 충분한 논의 끝에 각자의 길을 응원하기로 결정.
몇 줄을 읽고 나니 기사가 끝났다. 내가 모르는 사정이 더 적혀 있을까 싶어 아래로 내렸지만, 관련 기사만 나왔다.
휴대전화를 엎어놓으려다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우려고 몸을 숙였는데 손끝에 종이가 걸렸다.
“서경 씨.”
고개를 들자 강태오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를 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테이블 양옆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내 앞에는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다. 창가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
분명 방에 혼자 있었는데.
“왜 그래요?”
강태오가 묻자 나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밀었다. 바퀴가 테이블 다리에 걸리면서 몸이 기울었다. 옆에서 누군가 팔을 잡아줬다.
“괜찮아요?”
제작팀장이었다.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그 얼굴을 봤다. 안경이 달랐다. 지금 쓰는 것보다 테가 두꺼운 안경이었다. 저걸 밟아서 부러뜨렸다고, 술자리에서 한참 얘기한 적이 있었다.
“잠깐만요.”
일단 그렇게 말했다. 팀장은 내 팔을 놓았고,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전화를 집었다.
날짜를 확인하다가 화면을 껐다. 다시 켜봐도 같았다.
손가락으로 위쪽을 쓸어내렸다가, 잠금을 풀고 달력을 열었다. 잘못 봤을 리가 없는데 자꾸 다른 곳을 눌러보게 됐다.
“안 틀어요?”
나는 강태오를 봤다.
회색 니트 소매가 걷혀 있었다. 손목에는 내가 사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몇 년 전에 잃어버렸다던 시계였다.
그가 노트북을 가리켰다.
화면에 열린 파일명은 〈NB_DEMO_03.wav〉였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삼키려고 해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끝까지 말하지도 않고 일어났다. 누군가 뒤에서 뭐라고 했지만 돌아보지 못했다.
화장실로 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었다. 계단 옆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됐다. 문을 열고 들어가 곧바로 세면대를 잡았다.
거울 속 머리가 짧았다.
나는 귀 옆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어야 하는데, 손에 잡히는 길이가 달랐다. 자른 지 오래된 머리였다. 저렇게 자르고 한동안은 다시 안 자르겠다고 했었다.
휴대전화를 열어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맨 위에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날짜를 누르고, 첨부 파일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래에 있는 메일도 읽었다. 이미 답장을 보냈던 메일인데 받은 편지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작업을 마치고 돈이 늦게 들어와 몇 번이나 연락했던 일까지 기억났다.
화면을 내리다가 오른손 검지의 밴드가 눈에 들어왔다.
끝이 들떠 있어서 손톱으로 조금 벗겨봤다. 손가락 옆에 얕은 상처가 나 있었다.
참치 통조림을 따다가 벤 자리였다. 피가 생각보다 많이 나서 휴지로 한참 누르고 있었다. 가방 바닥에서 밴드 하나를 찾아 붙였고, 물에 젖어 다음 날 아침 새것으로 갈았다.
나는 벗긴 밴드를 다시 눌렀다. 접착력이 약해져 잘 붙지 않았다.
지금 이 상처가 있으면 안 됐다.
휴대전화를 떨어뜨리기 전까지 뭘 했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기사를 읽고 있었다. 네 명이 해체한다는 기사였다. 그 아래에 강태오의 인터뷰가 있었고, 보기 싫어서 뒤집으려다가 놓쳤다.
내가 쓰러졌나.
그렇다고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화장실 문이 열렸다. 직원 한 명이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아는 얼굴이었다. 퇴사한 지 몇 년이나 된 사람이었다.
그 직원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나는 한동안 거울만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무슨 말이라도 나올 것 같았는데, 입만 조금 벌어진 채였다.
휴대전화에는 회의 시작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아직 회의 중이었다. 내가 나왔으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수도를 틀고 손을 씻었다. 밴드가 젖어 아예 떼어냈다. 물기를 닦다가 휴지에 묻은 작은 핏자국을 봤다.
돌아가서 뭐라고 하지.
오 년 뒤 일을 기억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강태오가 나를 무슨 표정으로 볼지는 상상이 갔다. 팀장은 병원에 가보라고 할지도 몰랐다.
나는 휴지를 버리고 문 쪽으로 갔다가 다시 세면대로 돌아왔다.
지금 들어가면 곡부터 틀라고 할 것이다.
그 생각이 나자 노트북 화면이 떠올랐다. 세 번째 데모가 열린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양손으로 세면대 끝을 짚고 숨을 골랐다. 들이마시는 것보다 내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회의실에 돌아가도 당장 아무 말은 하지 말자.
우선 파일부터 닫아야 했다.
문을 열자 사람들이 나를 봤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당기다 무릎이 테이블에 부딪쳤다.
“많이 안 좋아요?”
제작팀장이 물을 밀어줬다.
“좀 어지러워서요. 죄송합니다.”
컵을 두 손으로 받았다. 목이 말랐는데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했다.
강태오는 내 얼굴을 보더니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아침 안 먹었어요?”
그 말을 듣자 잠깐 웃음이 날 뻔했다.
예전에도 저런 식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름 대신 서경 씨라고 부르면서, 밥을 먹었는지는 꼭 물었다. 헤어진 뒤 반년 동안 나는 그런 말에도 의미를 붙였다.
반년.
나는 컵을 내려놓고 그를 다시 봤다.
그때로 돌아온 거라면, 우리는 헤어진 지 반년쯤 됐다. 나는 스물여덟이었고, 저 사람과 다시 잘해볼 수 있을지 아직 생각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에게 하는 말인지 나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대답이 나왔다.
강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 번째부터 듣죠. 앞의 두 곡보다 그게 낫던데.”
나는 마우스를 잡았다.
재생 버튼 위에 커서를 놓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너무 익숙해서 그대로 누를 뻔했다.
피아노로 시작하는 곡이었다. 첫 후렴에 드럼과 베이스가 함께 들어왔다. 이 자리에서 반응이 좋았고, 일주일 뒤에는 다른 가수에게 넘어갔다.
그 앨범이 나온 날 검색했던 크레딧도 기억났다.
강태오의 이름만 있었다.
“서경 씨?”
나는 재생 버튼에서 커서를 옮겼다.
파일을 닫자 바탕화면이 나왔다. 정리하지 않은 폴더들이 화면 한쪽을 덮고 있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도 대충 알았다.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먼저 자료 좀 볼 수 있을까요?”
“무슨 자료요?”
“평가 대상자요.”
제작팀장이 서류철을 건넸다.
나는 첫 장을 넘겼다. 종이 두 장이 붙어 올라와 손끝으로 떼어냈다.
도린이었다.
교복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검은 백팩 옆에는 분홍색 토끼가 달려 있었다.
사진 아래 나이가 적혀 있었다.
열아홉.
다음 장은 가람이었다.
열여덟 살. 래퍼·서브보컬. 카라멜 브라운 머리를 높게 반묶음으로 올리고 카메라 옆을 보고 있었다.
세온의 사진에서 손이 잠깐 멈췄다.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고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연락하던 얼굴보다 훨씬 어렸다.
열일곱 살. 메인보컬 후보.
밥은 먹었냐던 메시지는 없었다. 지금 내 휴대전화에는 세온의 번호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자 리에가 나왔다.
높게 묶은 검은 머리와 라일락색 헤어 타이. 다른 애들보다 시선이 조금 아래에 있었다.
열여섯 살. 서브보컬.
그 밑에는 볼펜으로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옆의 빈 곳을 눌렀다. 종이를 더 가까이 가져와 읽었다.
“이 네 명을 제가 맡는 건가요?”
“네. 다음 평가까지 보고, 어려우면 정리하는 걸로 하죠.”
제작팀장이 말했다.
나는 네 장을 다시 앞에서부터 넘겨봤다. 가람의 사진에는 웃다가 찍힌 듯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 있었다.
조금 전 읽은 기사의 사진에는 다들 무대 의상을 입고 있었다. 지금은 연습생 프로필이었다. 아직 네 명이 함께 찍은 사진도 없을 때였다.
목이 메어 나는 물을 조금 더 마셨다.
강태오가 시간을 확인했다.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번에는 서둘러 파일을 열지 않았다.
“평가까지 며칠 남았죠?”
“열흘이요. 선곡부터 빨리 해줘야 애들도 연습하죠.”
열흘.
그때도 짧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곡을 주고, 안 되는 부분을 고치면 그 안에 무대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도린은 어디를 어떻게 고치면 되냐고 물었다. 세온은 높은 음 앞 소절부터 다시 불러봐도 되냐고 했다.
나는 일단 처음부터 맞추자고 했다. 질문에 답하는 동안 한 번이라도 더 연습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 평가에서 둘이 퇴출 권고를 받았다.
나는 애들 앞에서 회사가 결정한 일이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서류철을 덮었다. 손끝은 아직 차가웠다.
“계약서도 볼 수 있을까요?”
제작팀장이 강태오를 한번 보고 서류철 아래에서 종이를 꺼냈다.
“메일로 보낸 거죠? 기존 계약에 프로젝트 업무만 추가한 거예요.”
나는 첫 장부터 읽었다.
보컬 디렉팅, 평가곡 편곡, 가이드 녹음, 녹음 일정에 따른 수정 작업. 마지막에는 총괄 프로듀서가 요청하는 기타 음악 제작 업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장에는 제작진 표기가 붙어 있었다.
총괄 프로듀서 강태오.
음악 프로듀서 강태오.
작곡·편곡 참여자 추후 협의.
나는 마지막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건 언제 협의하나요?”
“발매 전에 정리하죠. 누가 얼마나 참여했는지 봐야 하니까.”
“이번에는 작업할 때마다 확인했으면 합니다.”
강태오가 팔짱을 꼈다.
“누가 무슨 얘기 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다시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컵을 들면 손이 떨릴 것 같았다.
“초안 만든 사람하고 수정한 내용을 남겨주세요. 곡이 확정되면 크레딧도 같이 확인하고요.”
제작팀장이 계약서를 들여다봤다.
“그건 원래 그렇게 하는데.”
“네. 그 내용을 넣어주세요.”
강태오가 짧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제작팀장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나는 강태오를 봤다.
조금 전 화장실에서까지 저 시계가 왜 여기 있는지 생각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든 제대로 알아들을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 저 말은 알아들었다.
따로 얘기하자고 하면 안 됐다. 그러면 또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항목이 어려우신데요?”
“항목 얘기가 아니잖아.”
나는 시선을 계약서로 내렸다.
“그럼 업무 얘기부터 끝내죠.”
“서경아.”
“제 이름이 빠졌네요.”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나는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강태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명의 평가곡 제작과 디렉팅은 제가 맡는다고 적어주세요. 작곡·편곡 크레딧도 실제 작업 내용을 확인해서 정하는 걸로 하고요.”
제작팀장이 펜을 집었다.
나는 펜 끝이 종이에 닿기 전에 덧붙였다.
“제 데모를 다른 팀에 제안하실 때도 먼저 협의해주세요.”
강태오의 표정이 굳었다.
“듣기도 전에 곡부터 묶어두겠다고?”
“다른 팀에 줄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저도 알고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말을 마치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겁이 났다. 정말 다른 사람을 부르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오늘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닫힌 서류철 사이로 리에의 사진 끝이 보였다.
나는 그걸 조금 빼냈다가, 사진이 상할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강태오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거 안 고쳐주면 작업 안 하겠다는 거야?”
대답하기 전에 숨을 한번 내쉬었다.
방금 해놓은 말을 거두려면 지금이었다. 몸이 안 좋아 예민했다고 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었다.
나는 계약서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네. 수정본 확인하면 데모 틀겠습니다.”